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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족이 무술을 잃는다는 건, 칼을 잃는 것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2010년, 나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작은 체육관에서 이 말을 들었다. 희끗한 머리를 질끈 묶고, 날랜 동작으로 제자들의 자세를 고치던 무술인이 있었다. 싼 끔 씨언(San Kim Sean).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마스터', 혹은 '보카토르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 3일 오후 1시 40분(현지 시각),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향년 80세. 그의 사망 소식은 <크메르 타임스>, <프놈펜 포스트> 등 현지 주요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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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3일 캄보디아 전통 무예 '보카토르'를 계승해온 최고의 마스터, 싼 끔 씨언이 세상을 떠났다. 이미지는 영화속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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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싼 끔 씨언 페이스북




"사자의 싸움", 칼 없는 전사들의 무예

'보카토르(Kun Lbokator)'는 크메르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보카(Bok)'는 카드대금 하루연체 '때린다, 싸운다', '토르(Tor)'는 '사자처럼'이라는 뜻. 이름 그대로 보카토르는 '사자처럼 싸우는 무술', 혹은 '사자의 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격투기를 넘어 고대 전사의 철학이 담긴 종합 무술이다.

고대 앙코르 시대의 유적지인 앙코르와트와 바이욘사원의 벽화에도 이 무술의 동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신한 마이카 대출 이율 사자, 코끼리, 악어, 매 등 동물의 움직임을 응용한 3천여 가지의 기술은 타격, 관절기, 낙법, 던지기, 무기술까지 포함한다. 마스터 싼 끔 씨언은 보카토르를 "칼 없이도 나라를 지킨 전사들의 몸짓"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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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앙코르 유적지인 바이욘사원에서도 창을 들고 적과 전투를 벌이는 용맹한 크메르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부조벽화를 볼 수 있다. 마스터 싼 끔 씨언은 보카토르를 “칼 없이도 나라를 지킨 전사들의 몸짓”이라고 불렀다.


ⓒ 박정연




이 무술은 무에타이와 유사한 점도 많아, 종종 태국의 전통무술과 비교되기도 했다. 특히 2003년 태국 액션 영화 <옹박>이 세계적 인기를 끌었을 때, 주인공 토니 자가 선보인 화려한 격투 동작이 사실 보카토르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논란이 일었다. 캄보디아계 혈통인 토니 자의 뿌리도 이 주장에 무게를 실었다. 싼 끔 씨언은 직접 언급을 피했지만, "무술은 민족을 나누는 게 아니라 잇는 것"이라며 크메르 전통의 공유 가치를 강조해왔다.

전통을 지키다. 죽음의 그림자를 넘어서...

그는 1945년 3월 24일, 프놈펜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마하몬트레이 사원에서 전통 무술 보카토르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복싱, 유도 등 여러 무술을 익혔다. 특히, 그는 현재 미국대사관이 자리한 곳에 있던 청소년 스포츠센터에서 한국인 사범 '최용호'로부터 합기도를 처음 접하고 깊이 배웠다. 이를 통해 그는 1973년 합기도 3단, 이후 미국 합기도 연맹의 공인을 받아 5단에 이르렀다.










▲  늦은 밤 자신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보카토르 마스터 싼 끔 씨언의 모습. 그의 뒷편에 태극기가 결려 있다. 1970년대 그는 어린 시절 '최용호'라는 이름의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합기도를 처음 배웠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셈이다.


ⓒ 싼 끔 씨언 페이스북




그러나 1975년 4월, 폴 포트 공산정권이 집권하면서 그의 삶은 산산조각났다. 전통 무술인들은 '봉건 문화'로 낙인찍혔고, 다수의 무예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숨어야 했다. 싼 끔 씨언 역시 '무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감시를 받았고, 결국 베트남군 점령 이후 미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난민 수용소와 노동현장을 전전한 그는 미국 휴스턴 YMCA에서 합기도를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미국에서 캄보디아 전통 무술인 보카토르를 가르치고 싶었지만,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대신 합기도를 가르치며 무술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체육관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의 안락한 삶보다, 고향의 전통을 택했다. 1992년, 가정과 안정된 생활을 뒤로한 채, 홀로 캄보디아로 귀국한다. 그 선택은 하나의 문화유산을 되살리는 첫걸음이 되었다.
살아남은 무예, 되살아난 유산
2001년, 그는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에게 보카토르 재건 허가를 받았다. 그해부터 전국을 돌며 살아남은 무술 스승들을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60세에서 90세 사이의 노인들이었고, 여전히 학살의 공포 속에 입을 닫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사정하며 다시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어요. 크메르 민족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었죠."
결국 몇몇 스승들이 문을 열었다. 정부도 이를 공식 지원하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캄보디아 보카토르 연맹'과 '보카토르 아카데미'를 세웠다. 이후 국내외에서 보카토르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늘었고, 훈련장도 수도 프놈펜에서 씨엠립까지 확장됐다.
싼 끔 씨언 마스터의 한국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2011년에는 캄보디아 한인회가 주관하는 교민체육대회에 특별 초청되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보카토르 무술 시범을 선보이며 현지 교민들에게 캄보디아의 찬란한 무술 전통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이끄는 보카토르 무술시범단은 캄보디아의 전통 무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2016년과 2019년, 한국 청주에서 열린 세계 무예 마스터십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보카토르 역사상 첫 출전한 국제 대회였던 한국 대회에서 그의 제자들이 은메달을 수상한 장면은 전세계에서 온 무술인들과 한국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는 싼 끔 씨언 마스터가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합기도를 배우며 한국 무술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것처럼, 캄보디아 전통 무술 보카토르가 한국 무대에서 다시금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  수년 전 캄보디아 현지 합기도 도장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보카토르 마스터 싼 끔 씨언의 모습. 어린 선수들의 도복에 써진 합기도 라는 글자가 눈길을 끈다.


ⓒ 싼 끔 씨언 페이스북




2022년, 마침내 마스터 싼 끔 씨언의 평생 염원이 이뤄졌다. 보카토르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무술이 아닌, 전통과 생존, 공동체의 기억을 담은 유산으로서 세계인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당시 캄보디아 훈센 총리는 보카토르의 유네스코 등재를 '국가적 자부심'이자 '문화적 정체성 보존의 승리'로 높이 평가하며, 캄보디아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사부님은 아직 가르칠 기술이 많다고 하셨어요."
싼 끔 씨언은 생전 늘 말하곤 했다.
"아직도 전해야 할 기술이 남아 있습니다. 3천 개의 동작 중 절반도 못 가르쳤어요."
그의 제자이자 캄보디아 보카토르 연맹 부사무총장인 아워 다라씨는 그를 "살아 있는 문화재"로 불렀다. 다라씨는 그의 죽음 소식에 "국가와 무예계가 큰 기둥 하나를 잃었다"고 밝혔다.
왓 참로은 캄보디아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도 <크메르타임스> 등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의 지식은 아직 다 전해지지 않았다"며, "그의 공헌은 단순히 무술이 아니라 나라의 문화적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스크린 무대에서 울린 전통무술의 메아리
202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서바이빙 보카토르(Surviving Bokator)>는 그의 인생과 제자들의 여정을 따라간 작품이다. 영화는 전쟁, 학살, 망명, 귀국, 복원까지 싼 끔 씨언의 모든 발자취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싼 끔 씨언이 숨어 지내던 생존자들을 찾아내고, 부족한 자원 속에서도 훈련장을 설립하는 등 보카토르를 부활시키기 위한 그의 끈질긴 노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제자들이 전통의 명맥을 잇기 위해 고된 훈련을 감내하며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 감동적인 과정을 그려낸다.










▲  캄보디아 전통무예 보카토르의 보전을 위한 노력과 열정, 그리고 숨겨진 스토리를 담은 영화 <서버이빙 보카토르> 영화 포스터. 지난 2023년 제작된 이 영화에 그는 주인공으로 직접 출연, 열연을 펼쳤다.


ⓒ 싼 끔 씨언 페이스북




당시 프놈펜 짜토목국립극장 시사회장에서 나는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기자를 대번에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세월을 비켜갈 수 없어 백발에 턱수염까지 났지만 그의 강인한 눈빛은 여전히 변치 않았다. 그는 수많은 기자들과 유명배우들, 정부 고위급 인사들, 외국 사절단 사이에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30년 전만 해도 아무도 보카토르가 뭔지도 몰랐습니다(웃음). 오늘, 캄보디아의 청년들이 이 중요하고 멋진 무대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무예를 선보일 겁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의 영향력은 캄보디아 국내에서도 빛났다. 2023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동남아시안게임(SEA Games) 개막식 공연에는 그의 제자 수백 명이 현란한 보카토르 전통 무예를 선보여 수 만여 관객과 동남아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며, 보카토르가 캄보디아의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는 마지막까지 체육대회, 보카토르 시연, 청소년 캠프 등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올해 3월 열렸던 캄보디아 전국 보카토르 챔피언십에서도 다시 건강을 되찾은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 선수들을 독려했다.










▲  보카토르는 ‘사자처럼 싸우는 무술’, 혹은 ‘사자의 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격투기를 넘어 고대 전사의 철학이 담긴 종합 무술이다. 위 이미지는 영화 서바이빙 보카토르 포스터


ⓒ Surving Bokator film 페이스북




전통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보카토르 마스터 싼 끔 씨언은 이제 없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살아 있다.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도장은 씨엠립, 프놈펜, 미국, 캐나다, 프랑스까지 퍼져 있으며, 그의 제자들이 여전히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말했다고 한다.
"보카토르는 살아남은 자의 무술입니다."

전쟁을 넘고, 학살을 견디고, 망명을 거쳐 돌아온 그가 몸으로 써 내려간 서사다. 그리고 그가 바랐던 대로, 이제 그 이야기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캄보디아 전체의 이야기, 더 나아가 세계가 함께 지켜야 할 이야기로 남았다.










▲  역사속에 사라지던 캄보디아 전통무예 '보카토르'를 되살린 마스터 싼 끔 씨언,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영원토록 남게 될 것이다.


ⓒ 싼 끔 씨언 페이스북